빗속의 잡음
비가, 온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물은 어느새 선을 이루며 장대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책상 옆에 놓여있는 우산을 보며 아침의 일기예보를 챙겨보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집에 가기 위한 자판의 타이핑을 멈추지 않았다. 쉬는 시간도 없이 열심히 달렸지만 애쓴 거랑 반대로 결국엔 야근이 확정되었다. 이것은 모든 직장인의 숙명이니 그저 한숨을 쉬며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는가, 부장이 퇴근하지 않으며 눈칫밥을 주니 일개 직원들은 같이 남을 수밖에.
그렇게 고된 시간이 지나고 온통 물바다가 된 땅을 처벅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다 와갈 무렵 뭔가가 이상했다. 길바닥에는 비로 인해서 보일 리 없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고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가로등은 불이 꺼진 채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건 어두운 와중에도 달빛에 반사하여 반짝거리며 보이는 어느 기계의 파편과 사람이 있을 리 없는 자신의 집에 환하게 켜져 있는 불. 모든 게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이것은 우연으로 이루어진 걸까 필연으로 무엇인가를 가리 키는걸까.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현실과 거리가 먼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었다. 저번 주말에 보았던 살인자의 일생을 담은 허구가 자신에게 현실이 되어 일어나고 있었다. 어떡해야 하는 거지. 경찰에게 연락은, 아니 확실하지도 않은데 그저 자신의 지레짐작이라면? 확인해보자. 머릿속의 신호등은 이미 빨간색으로 물들어버렸지만 묘한 기시감에 후루야는 집에 가던 발걸음을 다시 향했다.
그저 아침에 바빠 불을 안 끄고 나간 것이라고, 비가 와 음침해서 안 좋은 기분이 드는 거라 자위하면서. 3, 4, 그리고 5. 후루야를 실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다행히 중간에 엘레베이터가 멈추거나 불이 꺼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계속 간직하고 있던 꺼림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번, 망설임을 멈추고 손을 도어락에 올려놓고 두 번, 마지막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손잡이를 돌리며 세 번. 문이 열렸다.
*
"뭐야.."
자신이 잘못 봤었나 혹은 다른 집을 보고 착각한 건가. 잔뜩 긴장하고 열은 문은 가벼이 열렸고 집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깜깜했다. 그럼 그렇지. 불이 켜져 있는 건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생각하며 야근으로 인해 지친 몸을 이끌고 긴장하던 몸을 쇼파에 내 던졌다.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려는데 뭔가가 방해했다.
이게 뭐야. 쇼파가 축축했다. 방금 들어와 물을 쏟았을 리도 없는데도 물기가 가득 느껴졌다. 미쳐 우산으로도 피하지 못한 비를 맞았다고 해도 이 정도로 축축할 리는 없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쇼파를 더듬자 정체 모를 무언가가 손에 한가득 묻어났다. 물보다는 좀 더 응축된.. 정체를 알 수 없어 얼굴에 가까이 갖다 대니 철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에게 익숙한, 없으면 안 되는 피. 피가 머리로 몰렸다. 자신은 다친 적도 없는데 어째서.
적색 신호가 마구잡이로 울렸다. 자신의 집에서 불빛이 있다는 걸 발견한 시간 11:27 pm. 엘레베이테를 기다리고 탑승해서 문 앞에 도착한 시간 11:29pm 문을 열고 쇼파에 누운 시간 11:30 pm. 이 피의 주인은 아직 집 안에 있다. 그 짧은 사이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낮은 5층이라지만 배수관도, 화재 시 이용하는 비상탈출구도 없는 사이에 그 시간 안에 행적을 감추기란 뛰어내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목이 텁텁했다. 무언가가 자신의 입을 막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헐떡거리는 와중에 싸늘하면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에 닿았다. 살해당한다. 머리가 외쳤다. 몸은 두려움으로 인해 굳어진 지 오래였다. 미음의 목소리.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침식한다. 곧 무의식이 정신을 지배하겠지. 그리고 끝내 후루야 레이- 라는 사람이 사라지겠지. 그런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역한 쇠와 피 냄새가 뒤섞인다. 낮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침입자는 후루야를 협박했다. 그리고 이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피로 뒤범벅된 사람이 협박당하던 사람의 위로 쓰러졌다. 숨도 잘 쉬지 못한 채 살 궁리와 죽을 궁리를 하던 후루야의 바로 옆으로 날이 빛나는 채로 챙그랑 소리와 함께 목숨을 위협하던 무기도 같이 떨어졌다.
*
"일어났어요?"
무서운 전날 밤과 다르게 산뜻한 아침이었다.
"넌 누구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경계하는 눈빛이었지만 무기를 빼앗긴 맹수는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 절 죽일 수나 있나요? 일단 아침부터 먹어요."
주위를 둘러보더니 지금의 자신은 무방비한 줄 아는지 순순히 후루야의 부름에 응했다.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제가 먹는 거로 만들어 봤는데.."
"나한테 바라는 게 있나? 무슨 꿍꿍이지?"
후루야가 하는 말 끊고서 그가 말했다. 아무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붕대를 칭칭 감은 그의 모습은 오히려 우습기까지 했다.
"밥이나 먹어요"
정말, 귀찮은 사내였다.
*
"이리 와요"
아침보다 순해진 그는 후루야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 상처가 심해 흘러나온 피를 보며 병원에 가지 않아야 하냐고 중얼거렸지만 안 된다는 단호한 대답에 궁금증을 삼키며 벌어진 상처를 마저 소독했다. 그에게 어젯밤 일은 묻지 않았다. 신상정보도 그 무엇도. 감이 말했다. 아무것도 알면 안 된다고 진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출근해야 하는 후루야는 집에 버려둔 그가 걱정되었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는 집을 잘 지켰다. 집을 치워두는가 하면 빨래 건조도 시켰으며 돈은 어디서 났는지 장까지 봐왔다. 같이 산 지 일주일.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몰랐지만 사는 데 지장이 없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안 사실이 있다면 자신이 집에 돌아오면 명상을 하고 있다는 정도.
*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죠?"
"모로보시 다이"
같이 지내는데 계속 '저기'라 부를 수 없어 기대 없이 물어본 질문에 답변이 돌아왔다. 그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이름 모로보시 다이. '다이'란 어감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흡사 죽음을 몰고 다닐 거 같은 분위기와 이름.
"그럼 앞으로 모로보시씨라고 부를게요."
긍정의 답으로 모로보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나갈 채비를 할까요? 빨리 준비해요."
의문을 표하는 그를 보며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 주말의 날씨는 따뜻하여 광합성 하기 딱 좋았다. 어리둥절한 모로보시를 데리고 쇼핑가에 도착했다.
"집에 맞는 옷이 없잖아요."
마음껏 취향대로 고르라며 여러 옷가게를 돌아다녔지만 그 결과 그의 패션센스가 최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집는 거마다 죄다 검은색에 왜 자꾸 비니는 집는 건지. 그에 손에 들려있는 모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랴 혼이 났다. 칙칙하게 검은색이 뭐야. 한두 벌 까만 건 이해하겠다만 속옷도, 바지도, 상의도 심지어 겉옷과 모자까지 검은색이라니. 코난에 나오는 검은 범인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 저주받은 그의 패션센스에 혀를 내두른 후루야는 결국 자신이 옷을 골라주기로 했다.
*
"이건 뭐지"
"잔말 말고 입고 나오기나 해요."
키가 크고 비율이 좋은데도 온통 검은색이라니.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도 그리 잘 입는 편은 아니지만 그보단 낫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눈대중으로 몇 개를 골라 무작정 그에게 건네며 갈아입으라고 탈의실로 밀었다. 탐탁지 않은 듯 하더니 안에서 소란스럽게 쿵쾅거리더니 몇 분이 지나자 문이 열렸다. 약간은 어색한 듯 어정쩡하게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웠다.
까만 일자 슬랙스에 하얀 와이셔츠, 프러시안 블루색의 꽈배기 니트, 갈색 코트까지.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진작에 이렇게 입을 것이지. 옷걸이가 만족스러워 어떠한 옷도 잘 어울려 즐겁게 골라 담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아까와 같은 비슷한 옷을 더 구입하고 나서야 쇼핑의 끝이 났다. 온종일 옷을 갈아입고 돌아다닌 모로보시는 후루야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필요 없다고 말했으나 그의 말은 가볍게 묵살되었다.
"아 이런,"
또 뭘까. 이제는 후루야가 운을 띄우면 몸부터 움찔거렸다.
"옷만 잔뜩 사고 생필품을 안 샀네요. 내일도 나갈까요?"
그것은 악마의 미소였다.
*
피가 새어 나온다. 누군지 모르는 빨간입술이 뭔가를 속삭인다. 은색 머리카락이 눈앞을 왔다 갔다 걸린다. 곧 끔찍한 비명소리가 귀를 찌르더니 칼을 들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 칼로 사람을 찔렀다. 푹, 푹 얇게. 다음은 좀 깊게, 다시 빼내어 죽어가는 그의 등에 글자를 새기곤 또다시 칼을 박아넣었다. 피가 튀고 자신은 웃으며 온통 붉은색으로 흠뻑 젖었다. 가느다란 숨이 붙어있는 그 사람은 원망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눈을 노려봤다. 투명한 하늘색. 증오와 분노가 가득한 눈은 이글거리며 끝내 잠기지 못하고 밀색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치켜들었던 고개가 떨어졌다. 다시 피가 새어 나오고 아까보다 더욱 붉어진 입술이 속삭인다. 그리고.
"..로..시"
선명한 말소리. 누구지
"모로보시씨?"
헐떡거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손에 피부터 지워야 해. 죽은 사람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하지.
"모로보시씨"
얼굴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풍경과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 편히 지냈다고 그동안 너무 안일했나 보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다니. 자조적인 웃음이 펴졌다.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여태 이름을 몰랐군
"네 이름은 뭐지?"
여태 제 이름도 몰랐어요? 물론 알려준 적이 없긴 하지만.... 투덜거리며 결국 끝에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다.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사내군.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여태 지내면서 내려진 결론이었다. 깨워줘서 고맙다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입안에서 그의 이름을 굴려보았다. 후루야 레이.
*
이제 이 생활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면 후루야는 어느새 출근한 뒤였고 그 사이 볼일을 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라이"
쓸데없는 스팸 문자군.
"요즘 일이 재미있나봐?"
저조한 농담이었다. 일이란 재미로 할 수 있는 짓거리가 아니다. 그저 명령을 듣고 해야 한다는 지시에 따라 사살할 뿐. 거기에는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 행위였다. 그러니 닥치고 임무 내용만 전달해줬으면 좋겠군. 곧 다시 문자가 왔다. 처음의 문자는 역시 자신을 비꼬는 문자였군. 제대로 온 지시업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필 후루야가 퇴근 후의 시간이라니. 동거인의 눈을 피해 다녀올 수 있는 방법을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회식이라도 하고 오지 않는 이상 피를 묻히고 오는 자신을 후루야가 발견 못 할 리 없다. 절대 들켜선 안 된다. 직업도 자신의 다른 이름도. 또 다른 핸드폰으로 익숙한 단축번호를 누르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기만 기다렸다.
*
"모로보시씨?"
집의 불이 다 꺼져있었다. 이럴 리 없는데.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나 싶었지만 집에 사람의 온기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불을 켜고 자세히 살펴보니 신발도, 처음 왔을 때 입고 있던 옷도 없어졌다. 집에서 편히 입고 있던 옷까지 곱게 개어져 침대 위에 정갈히 놓여있었다. 돌아갔구나. 한마디 말도 없이. 씁쓸함만이 감돌았다. 불청객이었을 터인데 왜 이렇게 집이 텅 비어 보이는지. 사람의 온기가 가신 집은 겨울이 아님에도 꽤 추웠다. 그의 직업도 사는 곳도 모르던 후루야는 기묘한 동거인이 사라짐에 아쉬움만 들었다. 이름만 남기고 간 그 자리에는 혼란스러움이 대신 자리 잡았다.
*
"회색 기둥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45M 방향 타깃 발견"
"빨간 줄무늬 넥타이에 남색 정장 착용. 타깃이 움직임을 멈춘다. 조준 준비"
스코프를 통해 노리고 있는 목표물을 주시했다.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고 회색 기둥에 가까이 왔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저 없이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총에서는 경쾌한 소리가 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총알이 날아갔고 끝내 타깃의 몸을 파고들어 피를 머금었다.
"사살 완료"
원거리 임무라 피가 직접적으로 튀기진 않았지만 이 찜찜함을 씻어 버리고 싶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새 그 사람에게 물들어버린 건가. 웃기지도 않은 일이군.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하며 짧은 문자를 남겼다.
*
"라이, 임무는 좀 어때?"
세이프 하우스에 도착하자 스카치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날씨가 쌀쌀하더군"
"그동안 어디서 지낸 거야"
"찜찜하니 샤워하겠다"
"수건 없더라 들어갈 때 가져가~"
"고맙군"
샤워기를 틀자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리니 차가웠던 물이 미지근해지더니 곧 따뜻한 물로 바뀌었다. 긴 머리카락이 점점 젖으며 무거워져 갔다. 주책없이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손에 피를 묻히며 뒷세계에 사는 자신이 민간인 집에서 지냈다니. 알려지면 '후루야 레이'라는 따뜻했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자신이 입만 다물면 알려지지 않을 진실. 애초에 얌전히 집을 지키고 있던 것도 웃기는 일이다. 살해하고 바로 빠져나갔어야 하는데 잠들어 있는 그에게 다가가 살해를 시도를 할 때마다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금단현상이라도 걸린 건지. 그런 것 치고 오늘의 임무는 손 떨림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뭐가 문제인 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채 일주일이 지났다.
*
그 남자가 말도 없이 떠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도 괜스레 걱정되었다. 크게 다쳤는데 과연 상처는 잘 치료했을까, 매일 소독은 해주고 있는 걸까, 왜 아무 말도 없이 떠났을까. 자신만 아쉬운 인연이었던 걸까.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괴롭히는 그의 잔재에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다."
벌써 10시 가까이가 되었다. 그는 그때 무슨 일이 있기에 그렇게 다친 거였을까. 어떻게 집에 들어왔을까. 살해 위협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재워주는 자신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차마 경찰에 넘기고 싶진 않았다. 회사를 나서니 주변은 어느새 어둑해지고 길거리의 네온사인들만이 해를 대신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런 거리를 보며 낭만에 젖을 필요도 없이 피곤한 발걸음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익숙한 인영이 후루야의 집 안에 서 있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과 큰 키.
"모로보시씨?"
혹시나 하고 물어본 이름에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가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다고요. 정말이지, 모로보시씨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재수가 있네요"
평소에는 귀찮다는 표시라도 했건만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묵묵히 잔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자신도 왜 여기 있는지 깨닫지 못했을 뿐 더러 발걸음이 익숙하게 이끄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작 며칠 지냈다고 당연한 듯 세이프 하우스도 아닌 이곳으로 돌아오는지. 그저 조직에 손에 민간인이 살해당하는 게 싫어서 그뿐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웃기는군. 여태 이 손으로 몇백 명을 죽여놓고 일반 사람이 죽는 게 보기 싫어서라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그의 곁에 있을 명목이 필요했다.
"나 참 듣고 있긴 한 거에요?"
"날 기다렸나?"
"뜬금없이 뭔 소리예요. 갑자기 집을 나갔는데 당연히 걱정하죠"
내면 속에서 느껴본 적 없는 미묘한 감정이 살랑거렸다.
*
낯선 감정이었다. 사람을 처음 죽일 때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는데 후루야만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다니. 처음에는 병인 줄 알았으나 고장 난 것 치곤 다른 때에는 평소와도 같았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동안의 행보가 수긍되었다. 매일 후루야가 일을 마치고 오길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지루한 일이었다. 임무를 나갈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집에서 그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나날을 지내고 있었지만 오늘만은 좀 달랐다. 후루야가 퇴근하기 전 저녁을 만들어놓기 위해 며칠 전부터 무단히 노력했다. 먼저 쌀을 씻어 밥을 얹혀놓고 취사를 눌렀다. 다음은 야채들을 꺼내 흐르는 물에 헹구고 손질한 다음 마구 썰었다. 모양이 많이 뒤죽박죽이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기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프라이팬을 올리고 기름을 적당량 둘러 약한 불로 팬을 달궜다. 불이 올라오자 고기를 먼저 넣고 볶은 후 반쯤 익었을 때 썰어놓았던 야채를 투입했다. 불을 더 올리자 지글거리며 고소한 냄새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1분 채 가지 않아 살짝 탄 냄새가 났다. 급하게 불을 껐지만 이미 그을린 불쌍한 희생양들은 구할 수 없었다. 많이 탄 편이 아니라는 거에 감사해야 했다.
다음 작업은 냄비에 물을 한가득 받고 센 불로 끓이다 약불로 줄이고 카레 가루를 넣었다. 가루만으로는 부족한 거 같아 집에 있던 굴 소스와 돈까스 소스도 같이 넣어주었다. 카레보다는 짜장 같은 색이었지만 향은 괜찮게 올라왔다. 어느 정도 찐득해지자 손질해둔 야채와 고기를 넣고선 밥이 익길 기다렸다.
취사가 끝났다는 소리에 밥통을 여니 윤기가 흐르다 못해 넘치는 것 같은 자태의 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당량을 그릇에 덜어 담는데 주걱에 밥이 너무 달라 붙어 떼어내는 데 힘이 들었다. 여우 곡절 끝에 옮겨 담아진 밥 위에 아까 만들어둔 소스를 부었다. 오늘은 빨리 퇴근한다고 했으니 곧 있으면 후루야가 집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고 곧 문이 열렸다.
*
집에 들어서자마자 정겨운 음식 냄새가 달려와 부둥켜주었다. 설마 모로보시씨가 저녁을 만들어 놓은 건가? 의문을 들고선 향기로운 음식 냄새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섰다. 식탁에는 완벽하게 수저와 요리가 세팅되어있었다.
"와서 먹도록 하지"
무심하게 말했으나 자신을 위해 요리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그가 귀여웠다. 기대를 한가득 품고 미처 갈아입지 못한 복장 그대로 식탁에 안착했다. 그럼 식사를 해볼까. 밥에 카레를 잔뜩 묻혀 입으로 가져갔다. 씹으면 씹을수록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맛에 가까스로 물과 함께 삼켰다. 모보로시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 눈빛이 얄밉기까지 했다.
"모로보시씨도 어서 드세요."
간신히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도 음식을 권했다. 그제서야 한 숟갈 뜨고 입에 넣더니 갈수록 표정이 구겨졌다.
"맛없군"
"네 그러네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아, 할 수 없지. 스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나 놓여있던 카레를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결국 다 버리니 풀이 죽어 보이는 그의 뒷모습에 살며시 웃으며 그를 불렀다.
"모로보시씨 이리 와봐요."
*
우선은 앞치마부터. 집에 있던 곰돌이 앞치마를 그에게 씌어주니 그 큰 덩치가 깜찍하게만 보였다. 자신도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이것 좀 씻어주실래요?"
자신이 건네준 쌀을 받들더니 곧장 물에 가져가 꽤 능숙하게 씻겼다.
"다 했으면 저에게 주세요. 물양은 제가 맞출게요."
고개를 끄덕이더니 깨끗해진 상태의 쌀을 넘겨주었다. 봐봐요. 물양은 이 정도로. 알겠죠? 정말 안건지 그저 반사적인지 모르겠지만 긍정을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채소 손질이었다. 먼저 양파의 껍질을 까고 흐르는 물로 닦았다.
반으로 잘라서 깍둑썰기를 한 다음 칼을 그에게 넘겼다. 이런 모양으로 다른 야채도 자르면 돼요. 할 수 있겠어요? 뭔가를 결심했는지 칼을 들고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신중히 하나하나 잘라갔다. 어디 봐요. 조금은 삐뚤빼뚤하지만 네모난 야채들이 줄지어 도마 위에 놓여있었다.
잘하네요. 약간의 칭찬에 왠지 모르게 뿌듯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남몰래 웃었다. 이런 거로 기뻐하는 사람이라니. 인상과 다르게 귀여운 사람이었다. 여기부터는 제가 할게요. 능숙한 손놀림으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야채과 고기를 볶았다. 어느 정도 익으니 물을 붓고 10분 정도 기다렸다.
모로보시씨가 넣어볼래요? 카레 가루를 이 정도만. 봉지에 들어있던 가루를 그릇에 따로 덜어 그에게 넘겨줬다. 받더니 프라이팬에 쏟은 다음 나무 주걱으로 섞기까지. 알려주지 않은 젓기도 스스로 하다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들었다. 그렇게 몇 분 끓이고 밥이 다 익음과 함께 요리도 끝이 났다. 그릇에 새로운 밥과 카레를 덜며 먹어보라 권했다. 맛을 보더니
"원래 다른 소스는 안 들어가나?"
이상하게 카레가 시큼하다 했더니 그 정체가 다른 소스였나 보다. 어찌되었든 식사는 무사히 하였다.
*
벌써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후루야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시곗바늘과 현관문을 번갈아 보며 그를 기다렸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설마 조직의 사람인가. 한껏 심각해진 표정으로 문에 달린 외시경을 통해 밖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업혀있는 후루야. 사람을 확인하고선 재빨리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아 그쪽이 모로보시씨?"
불쾌함이 치밀어 올라왔다.
"저는 후루야씨의 직장동료인 미야타 겐지입니다. 후루야씨가 술에 많이 취해서.."
자신도 불러본 적 없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야타 겐지. 레이의 직장동료. 언짢은 기분을 굳이 숨기지 않고 그 사람을 보냈다. 인사불성이 된 채로 경계심도 없이 딴 남자에게 업혀 오다니. 걷지도 못하는 후루야의 옷을 벗기고 간소하게 씻겨 침대에 눕혔다. 자신의 마음에는 열불이 나는데도 곤히 자는 그의 모습이 거슬렸다. 충동적으로 후루야의 쇄골에 입술을 묻고선 깨물었더니 뒤틀려진 붉은 꽃이 깊게 새겨졌다.
*
맞이하기 싫은 찐득한 아침이 무리한 위장과 함께 햇살을 반겼다. 술병이 나도 출근은 피할 수 없기에 나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반나절을 의자에만 앉아있었더니 허리가 말도 안 나오게 뻐근했다. 잠깐 쉬고 올까. 찌뿌둥한 몸을 달래며 옥상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문을 열자 답답했던 사무실 공기와 대조되는 화창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후루야 반겼다. 옥상에는 미리 온 사람이 있었는지 공기를 쐬며 막 들어선 후루야에게 다가오더니 반갑다는 듯이 인사했다. 같은 부서는 아니었지만 동기로 입사해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다. 꽤 오랜만에 만나 그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 옥상을 내려오다 누군가와 부딪쳤다.
상대방이 들고 있던 음료가 쏟아지며 온몸을 뒤덮었다. 곧바로 사과가 들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커피는 옷에 슬며 들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르며 사과하는 모습에 그저 괜찮다고 하며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도저히 이 상태로 일은 못 하겠네. 바로 옆자리인 미타야씨에게 옷을 사서 와달라고 부탁하며 화장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지 한숨을 쉬며 옷이 오길 기다렸다.
"후루야씨 여기요!!"
예상외로 빨리 온 미타야씨가 옷을 건네줬다. 원래의 셔츠를 벗고 새로 갈아입으려는 순간 쇄골의 뭔가가 거슬렸다. 이게 뭐지. 벌레가 물기라도 했나. 인정하긴 싫지만 벌레 자국이라긴 보단 흡사 키스 마크 같은 자국이었다. 어디서, 언제 당한 지도 모르는 자국은 깊이 새겨지며 불쾌감이 치고 올라왔다. 그저께까진 분명 없던 자국이었다. 어제 술에 취했다고 했지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조차 알지 못하다니. 의심 가는 인물을 떠올려 보려고 했으나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
"모로보시씨"
심란한 마음으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언제나 같은 동거인이 있었다. 묘하게 안심되는 기분 탓에 자신도 모르게 칭얼거렸다. 처음의 모로보시씨는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 보기만 해도 오싹한 눈을 가진 사람. 지금은 왜인지 분위기가 누그러진 느낌이라 한결 편해졌다. 별다른 말을 해주진 않지만 그만의 방법으로 묵묵하게 들어주는 위로 덕분에 찜찜했던 기분이 씻겨나갔다. 텅 비었던 집에 반겨줄 사람이 있고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고 같이 밥을 먹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공허했던 마음을 채워 주어 이대로만 이 생활이, 행복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
신경 쓰인다. 후루야가 술 마시고 온 날부터 그의 직장동료인 미야타 겐지라는 그 남자가 심하게 거슬렸다. 그 이후에도 후루야와 자주 연락하는 것은 물론, 회사 외 밖에서도 따로 만나는 모습까지 눈에 띄었다. 후루야조차 그의 이야기를 많이 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무관심하던 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대화가 갈수록 심기를 거스르고 그 화는 누적되어만 갔다. 특히 후루야가 그 사람에게 웃어줄 때면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기 바빴다. 저 사람만 없었다면 후루야의 웃음이 온전히 자신을 향할 텐데. 섬뜩한 생각을 하는 모로보시를 아는지 후루야는 밝게 웃고 있었다.
비가 온다.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모여 울고 있었다. 온통 까만 옷을 입은 채 한 사람의 죽음을 위로하는 현장에 후루야도 빠지지 않았다. 회사에서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미야타 겐지는 살인 당했다. 야근을 하고 늦은 시간 걸어가다 칼에 찔려 즉사했다고 형사가 말했다.
운이 좋지 않아 묻지마 범죄에 휘둘린 거라고 생각은 후루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한 명씩 없어져 갈 때마다 희미해졌다. 똑같은 수법. 특징이 있는 살인은 아니었지만 후루야와 한 번이라도 말을 섞었던 사람, 항상 밤에 걸어가다 흉부에 깊게 찔린 상처. 어찌나 교묘한지 cctv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나 특정한 범인을 추려내지도 못했다. 후루야는 근 한 달간 수차례 경찰서에 불려갔고 그사이 수척해졌다.
매번 똑같은 형사의 질문에 이제는 먼저 묻지 않아도 대답이 술술 나왔다. 피해자와의 관계, 분위기, 원한을 가진 사람, 알리바이. 질리도록 심문을 받아야지만 경찰서를 나설 수 있었다. 범인으로 지목되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 알리바이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살인이 일어날 때 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었기에 그나마 의심을 덜 받았다. 어쩌면, 후루야는 범인을 알았다. 본인의 스케줄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이었으니.
하지만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아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후루야가 그를 의심하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집에 늦을 때면 항상 연락을 했고 그는 돌아오는 시간을 항상 물어봤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상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을 때 집에는 적막감이 감돌았고 곧 돌아온 그의 옷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혹시나 상처가 벌어진 걸까 싶었지만 언뜻 보았던 상처 자리는 깔끔했다. 의심은 깊어져만 갔고 좋아하던 마음보다는 두려움이 가득 찼다.
8번째 살인이 일어나고 후루야는 무서움을 무릅쓰고 모로보시씨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그렇다면. 숨이 막혀왔다. 의식하지 않았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맥박이 점점 빠르게 움직이는 게 귀를 통해 들렸다. 무서움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며 등을 감싸고는 팔과 다리, 그리고는 목을 졸랐다. 극도의 긴장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모로보시씨는.... 매일 밤 어딜 그렇게 갔다 오는 거죠?"
목소리가 떨리는지 잘 감췄는지조차 두려움에 알 수 없었다. 그의 붉은 입술을 바라봤다. 자신이 생각하는 말이 아니길 간절히 바랬다.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 확인 사살이라도 받고 싶은 모양이지?"
치가 떨렸다. 범인은 바로 자신 앞에 있었다. 외면해오던 짐작이 현실도 덮쳐들었다.
"왜냐는 눈빛이군. 뻔하지 않은가. 레이, 너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거슬러서."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나요?"
"고작이라니. 너의 눈동자가 오직 나만 향하길 원한 건데 그게 나쁜가?"
몸의 떨림이 멈췄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후루야를 가득 채운 건 두려움도 무서움도 아니었다. 그저 분노뿐.
WRATH
.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