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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이라는 게 꼭 계획된 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강준영이었지만, 꼭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들만 골라 일어나는 것은 모두 망할 이상윤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준영은 자신의 손에 들린 쪽지를 다섯 번째 다시 확인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다시 보고 노려봐도 쪽지의 글자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공주]

 

준영은 저 멀리서 [왕자]가 적힌 쪽지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상윤을 노려보다가, 앞의 칠판에 이젠 바꿀 수도 없이 적혀있는 배역 리스트를 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준영은 분명 완벽했던 자신의 잠입 계획을 돌이켜보았다.

 

세계적으로 큰 어느 기업의 비리장부를 입수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처음 신고를 받은 경찰서에서는 장난 신고로 치부하고 넘겨버려 초기 대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런 증거가 흘러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제의 기업에서는 신고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준영은 갑자기 난폭운전을 하는 어느 트럭을 쫓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사고로 신고자는 의식불명상태. 그러나 신고자가 매일 동생이 근무하던 학교에 들러 퇴근하는 동생을 차에 태워갔다는 증언을 들은 준영은 그 학교 어딘가에 증거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 다음부터는 당연히 가장 의심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학교에 들어가 내부를 쏘다녀도 이상하지 않도록 잠입을 계획했다. 기업측에서도 당연히 학교 내부의 증거를 빼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리라 생각한 준영은 의심받을 확률이 높은 교사보다는, 자신의 이국적이고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외모를 이용해 학생으로 잠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도 서른인데 고등학생이 되시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라는 심재형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교복을 입자 준영은 누가 보더라도 고등학생임을 의심하지 않을 모습이 되었다. 당당하게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으로 다시 전학을 온 설정으로 준영이 그 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만 해도 이 계획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문제는 준영의 잠입 한 주 뒤에 시작되었다. 매일 밤마다 보안 시스템을 뚫고 교무실부터 시작해 학교 구석구석을 살피던 준영이 여태 발견하지 못한 증거가 어디 있을지 새롭게 추리하며 이제는 익숙해지려는 교실에 앉아 수업을 기다릴 때, 준영으로서는 잊지 못할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해외에서 전학온 학생이라는 준영과 똑같은 설정으로 들어온 상윤을 본 준영은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을 애써 태연하게 붙잡아보려 애썼다. 낮에는 그럭저럭 넘어가던 준영은 결국 밤늦게 자신과 같이 미리 해제시켜둔 경비시스템을 지나 오늘 준영이 돌아보려던 별관 건물로 들어가는 시커멓고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하고서 폭발해버렸다.

 

“이상윤!!!”

 

상윤은 말 대신 준영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올 다른 누군가를 피해 준영의 입을 막고 근처의 빈 교실로 숨어들었다. 준영도 실수했다는 사실은 알고 얌전히 상윤의 손에 잡혀주었지만, 애초에 이상윤이 여기 없었더라면 내가 이런 실수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은 발소리가 가까워지다 다시 멀어지고 나서야 둘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여긴 왜 온겁니까? FBI는 우리나라에서 나가라고 했을 텐데요.”

“오래간만에 만난 연인에게 너무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학교에 숨겨진 기업의 비리 자료, 그건 FBI에서도 필요로 하고 있어.”

“그건 내가 먼저 찾을 물건이고 당신에겐 줄 생각 없습니다. 저리 비켜 이상윤!”

 

물론 차분한 대화라는게 준영과 상윤 사이에서 오래 이어지기 힘들었기에 금방 혼자서 찾을거라며 준영이 돌아서 나가려던 찰나, 상윤이 호오, 하는 감탄과 함께 손에 뭔가를 잡아들고 흔들었다. 준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상윤은 가져온 자신의 스마트폰과 연결해보더니 준영의 앞에서 웃어보였다. 반응만 봐도 상윤의 손에 들린 물건이 준영이 열심히 찾아다니던 그 물건이 확실해보였다. 준영은 뒤를 생각하지 않고 우선 상윤의 손을 노려 덮쳤다. 먼저 찾지 못했다면 빼앗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여기는 한국, 또 불법 수사를 하고있을게 뻔한 FBI가 할 말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준영의 그런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한 듯, 상윤은 가볍게 준영을 제압하며 문제의 USB를 품속에 숨겼다. 그리고 준영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두 주만 이 학교에 같이 다녀준다면 USB는 양보하지.”

“그 시간이면 이상윤 당신이 복제해서 자료를 빼돌리고도 남을 시간인데 어떻게 믿죠?”

“준영아, 난 너에게 거짓말하지 않아.”

 

헛소리인데, 분명 자신에게 했을 거짓말이 두 손가락을 다 꼽고도 모자랄텐데, 준영은 늘 자신에겐 다 져준다는 듯 다정한 저놈의 목소리에 약했다. 약속은 지키세요 두 주입니다. 준영은 그냥 두 주만 참고 학교를 마저 다니자 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 자신의 손으로 [공주]가 적힌 쪽지를 뽑기 전까지는.

 

거기다 이상윤이 [왕자]라니. 준영은 이 결과를 상윤이 조작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쪽지는 자신이 뽑았고, 상윤은 자신과 한참 멀어진 곳에 앉아있으며, 결정적으로 준영은 자신이 상윤의 술수에 놀아났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언제나 그렇듯 이상윤의 운이 좋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차라리 덜 열이 받았다. 준영은 이미 확정된 결과를 부정하기를 포기하는 대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고등학생정도의 연극, 이미 트리플 페이스를 연기해 본 경험으로 일찌감치 들켜서 도망가버리고 어설픈 대학원생 연기나 하던 저 이상윤을 압도해버리리라 생각하던 준영은 다시 칠판을 보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고등학생들이니 유치하다고 바꾸자고 하지 않을까 라는 일말의 기대를 해보았지만 의상팀을 맡게 된 여학생들이 꾸미는 보람이 있겠다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준영은 그 기대도 포기하고 속으로 이상윤에게 미래를 기약하며 이를 갈았다.

 

연극 연습과 준비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준영과 상윤은 대본이 나온 그날 저녁 모든 대사를 다 외웠고, 연습에서 한번도 틀리지 않았다. 교복을 입고 진지한 목소리로 낮간지러운 대사를 하는 상윤을 보며 여학생들이 잘생겼다며, 영국에서 와서 더 왕자님같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듣던 준영이 저 인간은 미국놈이라고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은 것을 참느라 얌전히 누워있지 못하고 꿈틀거렸던 일들을 빼면 이대로 무대에 올라가면 우승이라고 할 만큼 준비는 완벽했다. 마지막에 공주를 깨우는 키스도 연습 때의 상윤은 가까이 다가와 키스로 보일만큼만 접근할 뿐, 준영이 걱정했던 것처럼 시도때도 없이 입술을 문지르진 않아서-준영은 상윤이 실수를 핑계로 매번 입술을 부딪힐 줄 알았다- 준영은 약속했던 두 주가 다가와 무대에 올라갈 때엔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이 연극만 끝나면 상윤에게 약속했던 자료를 받고, 그대로 이상윤을 내쫓아서 반년 뒤에나 내가 미국에 가야지 라는 미래 계획을 세우며 준영은 무대에 올랐다.

 

연극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의상팀의 학생들은 어디서 준영의 머리색과 꼭 맞는 금발머리 가발을 구해와 머리에 붙이고서 금발의 공주님이라며 기뻐했고, 도대체 어디서 가져온건지 큰 키의 준영의 몸에 맞는 드레스를 입히고 가슴 보정물도 밀어넣어 무대 아래에서 준영의 성별을 알아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준영이 물레에 찔려 쓰러질때까진 준비한대로 완벽하게 상황은 흘러갔다. 대본대로 준영이 쓰러지고, 이제 배경이 움직여야 할 시간에 갑자기 계획에 없던 연기가 흘러나올때가 되어서야 상윤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기가 걷히고 탑과 원래 준영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당황하는 학생들을 진정시킨 것은 상윤이었다. 아직 관객들이 이상함을 눈치채기 전에, 준영과 미리 계획한 일이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태연하게 연기하며 관객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사라진 준영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원래의 연극에서 공주를 찾으며 겪을 가시덤불은 다른 관객들 사이를 헤쳐나가는 것으로 바꾼 것처럼 자연스레 연기하며 움직이던 상윤의 눈에 강당 2층 스탠드에서 빛나는 준영의 드레스 장식이 보였다. 이제 공주에게 저주를 걸었던 마녀를 잡으러 갈 시간이다, 상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빈 의자를 발판삼아 2층으로 뛰어올랐다.

 

상윤이 아래에서 봤던 준영의 드레스를 빛냈던 장식들은 2층 스탠드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마치 이쪽으로 오라는 듯, 상윤을 구석의 비품실로 이끄는 장식을 따라 들어가자, 매트리스 위에 누운 준영이 보였다. 상윤이 준영의 옆으로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총알이 날아왔고 상윤은 준영의 위에 엎드리며 총알을 피해 품에서 숨겨온 총을 꺼냈다. 범인을 확인하는 것과 총을 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고, 여전히 현장에서 녹슬지 않은 사격실력을 자랑하는 FBI의 스나이퍼는 정확하게 범인의 무기를 쏘아 떨어트리고 밖에서 대기했을 지원을 불렀다. 밖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채 기다릴 학생들과 관객들이 더 동요하기 전에 상윤은 준영을 안아들고 비품실에서 나와 아래로 뛰어내렸다. 관객들은 상윤의 액션에 감탄했고 저 행동이 아무런 보조장비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는 학생들은 멀쩡히 걸어오는 상윤을 보고 안심했다.

 

그런 주변의 반응은 상관하지 않고 상윤은 준영을 안아든 채 무대로 돌아왔다. 준영이 꼼짝않고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원래라면 물레바늘에 찔려 쓰러지는 척만 해야 할 준영에게 약물이 소량 투여된 것 같았다. 상윤은 준영에게 투여되었을 약물의 후보들을 쭉 생각하다가 준영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다.

 

준영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상윤의 눈이었다.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준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음 느껴진 것은 사람들의 환호였다. 그리고 다음은, 사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입술에 닿은 살짝 거친 감촉이었다. 준영이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감촉에 준영은 아직 남은 약기운과 자신을 안정적으로 안은 팔 힘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환호소리는 더 높아지다가, 결국 정신을 차린 준영이 상윤의 멱살을 잡는데 실패하고 급하게 막이 닫히고 나서도 한참 더 이어졌다.

 

 

p.s.

“준영아, 점심 아직이면 같이...”

“경찰청에서는 제대로 불러주면 좋겠군요, 이상윤 수사관. 저는 언제라도 당신들을 이 나라에서 내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준영아, 결국 너도 좋았으니까 합동수사를 허락...”

“시끄러워요 이상윤! 저리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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